본문 바로가기

[아스유마] 유우마가 기억을 잃은 이야기

다 녹은 촛불이 자연스럽게 꺼져버리듯이 유우마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가 기억하는 건 누나와 할머니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과 듀얼을 했던 경험들 뿐, 친구와 그동안 듀얼을 해왔던 상대들, 듀얼로 이어진 동료들에 대한 기억은 깡그리 사라져버린 채였다. 그는 심지어 제 부모님에 대한 것도 잊어버렸다. 따뜻한 손길과 웃음소리가 그의 기억속에 희미하게 자국을 남기고 있을 뿐, 제 부모님의 모습과 이름에 대한 것은 모두 잊어버린 채였다. 바쁜 아카리를 대신해 할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은 유우마였으나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다는 소견 뿐이었다. 소식을 들은 이들이 앞다투어 유우마네 집에 찾아들었다. 기억의 대부분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유우마는 더없이 고요하고 온화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제는 이 세계에 없는 아스트랄처럼. 아니, 아스트랄과도 어딘가 달랐지만, 무엇이 어떻게 되었든 지금의 유우마는 예전의 유우마와 너무나도 달랐다. 더없이 온화한 몸짓, 항상 온 힘을 다해 크고 자신감 넘치게 말하던 목소리가 저렇게 잔잔하고 나긋할 수가 없었다. 유우마의 껍데기를 씌운 다른 인물이라도 된 것마냥. 그는 자신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들에게 뜻하지 않은 인지 부조화를 일으켰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몇 번씩 왔다 갔음에도 불구하고 유우마는 그저 고요하게 엷은 미소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예전의 유우마라면 동물원 원숭이 구경 왔냐며 성을 냈을 터였으리라. 넘버즈 클럽 친구들이 '과거의 츠쿠모 유우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꺼내고 인연이 닿은 이들과 함께 저 너머의 기억속 먼지까지 탈탈 털어내며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유우마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조용하게 웃으며


"그랬군요."


라고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그 단 한 마디 조용하게 흘러나온 소리의 파급은 상당히 컸다. 소식을 듣고도 반신반의하던 이들에게도 찬물을 끼얹은 것과 같은 현실감이 찾아왔다. 그랬군요. 둥실둥실 공중에 떠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감각을 가지고서 찾아온 이들에게 갑작스레 현실이라는 이름의 바닥에 메다꽂은 충격을 안겨다준 한 마디였다.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느낀 유우마의 가족들은 갑자기 많은 일들이 일어나 유우마도 피곤할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달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는 이들을 향해 유우마가 엷은 미소를 그린 채 배웅을 하였다.


"다음에 또 뵈어요."


그 말에 결국 코토리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카이토와 트론네 일가가 유우마의 상태에 대해 급히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보다 원인에 대해 가설을 빠르게 세울 수 있었다. 유우마는 본래 아스트랄의 분신이었으나 이제는 아스트랄과의 연결고리 마저 끊어지고 그 여파로 아직 그에게 남아있었을 아스트랄계의 에너지가 이 곳 인간계와 맞지 않아서 새로이 인간계에 적응하게 된 대신 그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내용의 가설이었다. 완벽하게 파악된 것은 아니지만 이 이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고, 그동안 바리안계나 아스트랄계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고는 해도 유우마의 경우는 당연하게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당장 이렇다할 치료법은 아무리 카이토나 트론 일가여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일단 츠쿠모 가에는 발견된 가설에 대한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를 보냈고, 뭐가 어찌되었든 그들은 담담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아니, 적어도 '기억을 잃은' 유우마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유우마 본인이 저렇게 나오는데 무얼 더 말하리. 적응이 안되지만 가족들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었더라도 넌 여전히 내 동생이고 우리들의 소중한 가족이야. 유우마를 꼭 껴안은 채 아카리가 주문을 걸듯이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 섞인 울음을 알아차렸을까. 유우마는 조용한 목소리로 "네, 누나." 라며 자신을 안아주는 아카리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어느 누군가가 어떤 일에 휘말리든 시간은 전혀 개의치 않고 흘러갔다. 달라진 유우마가 아직은 어색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익숙해진 친구들은 전처럼 유우마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때서부터였다. 유우마의 행동반경에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처음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바뀌어버린 유우마는 더없이 조용하고 또 조용했기에. 알아차리는 것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유우마의 상태를 가까운 그의 가족보다도 동료들이 먼저 어렴풋하게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음과 동시에 유우마는 듀얼마저 그만두었기에 그가 엑스트라 덱까지 빠짐없이 챙긴 모습으로 광장 한 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모습은 그를 다시 알게 된 이들이 보기에 이상함을 어떻게든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늦은 밤에 나와 광장 한 가운데에 서있는 모습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기도 했다. 광장을 지나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고 근처에서 영업중이던 가게들이 하나 둘 장사를 접느라 불을 끌 때까지 한 자리에서 하염없이 서있던 유우마는 이젠 광장에 남은거라곤 가로등 불빛밖에 남지 않았을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그런 이상행동은 계절이 지나갈 때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파리들이 하나 둘 저물어가고 온통 하얀 세상이 하트랜드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추운 겨울에도 유우마는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그렇게 광장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코와 뺨이 추위에 벌겋게 얼어감에도, 몸에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쌓여감에도 꿋꿋한 그를 보다못한 이들이 억지로 근처의 벤치에 앉혔다.


"여기서 대체 뭐하는거야?"

입김을 하얗게 부숴트리며 샤크가 물었다. 멀리서 코토리와 리오가 손에 따뜻한 음료를 쥔 채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우마는 추위에 굳어진 입을 천천히 열었다.

"기다리고 있어요."

그 대답에 샤크는 한 쪽 눈썹을 치켜떴다. 유우마를 지켜보던 이들 중 하나인 아리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유우마에게 "누구를?" 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 유우마의 시선이 이 곳이 아닌 저 너머를 더듬어가듯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유우마는 입을 열었다.


"저(私)도 잘 모르겠어요. 이름도 얼굴도 기억을 할 수 없는 그 누군가를, 저는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코토리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이들도 유우마가 기다리는 이가 누군지 깨달았다.
'아스트랄.'

이 곳 광장은 예전에 유우마가 아스트랄과 처음 만난 장소임과 동시에 아스트랄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장소이기도 했다. 멀어져 있던 시선을 지금 있는 자리로 끌어당긴 유우마는 다가올 크리스마스로 인해 화려하게 꾸며진 거리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는 예전의 저와 어떤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얀 눈에 찍혀있는 발자국처럼 기억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 얼마 없는 기억이 끊임없이 속삭여요. 그를 기다리라고. 그곳에서 기다려달라고."
이제는 식어버린 음료를 마저 마신 유우마가 가늘게 웃었다.

"만나게 되면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무엇을?"
"뭐든요. 뭐든지."
그 대화를 끝으로 유우마는 다시 광장의 한가운데에 시선을 던졌다. 가만히 한 쪽에서 조용하게 서있던 리오가 유우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런 얇은 차림으로 있다간 감기 걸릴지도. 감기에 걸린 것을 그 사람이 알면 걱정하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다 마셔버린 음료용기 대신 덱 케이스를 손에 쥔 채 유우마는 리오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미 끝자락에는 희미하게 확신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거리에 사람이 줄어들고 가게에 불이 하나둘씩 꺼져가기 시작했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걸 느낀 유우마는 쥐고 있던 덱 케이스를 익숙한 손길로 벨트에 고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익숙해진, 나(俺)가 아닌 나(私)라고 지칭하는 것과 함께 너무나도 익숙해진 작은 미소로 유우마는 안녕을 고했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

조용하고도 스스럼없이 돌아가는 그 걸음은 유우마가 기다리던 이를 만나는 날이 올 때까지 쭈욱 이곳에서 변함없이 기다리겠노라- 하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우마도 모르고 있는 그리움이 유우마를 따라 눈길에 발자취를 남겨놓고 있었다.






**

썰백업하다가 발견함

원 트윗 타래는 이쪽 → https://twitter.com/nogume_418/status/815988520263159809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벡터유마] 메리 배드 엔딩  (0) 2017.01.27
[벡터유마] 새벽  (0) 2017.01.20
[아스유마] 너에게로 떠나는 여행  (0) 2017.01.16
[벡터유마] 유성우  (0) 2017.01.12
(R-18)[샤크유마] 추억  (0) 2017.01.05